1. 폐허가 된 고아원, 시간의 틈으로 들어서다
키워드: 폐고아원 탐험, 고아원 건물 폐허, 시간의 정지
도시 외곽, 한적한 산자락 아래 오래된 건물 한 채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80년대 중반 지어진 이곳은 과거 사회복지시설로 운영되던 고아원이었다.
운영 주체가 해산된 이후, 시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건물은 보수 없이 방치되며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는 단순한 구조물 이상의 것이 남아 있었다.
벽에는 여전히 ‘소망의 집’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었고,
출입문 근처에는 어린이용 자전거, 플라스틱 책상, 빨간 미끄럼틀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흩어져 있었다.
처음부터 이 탐험은 조심스러웠다.
누군가의 어린 시절과 상처, 기억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건물 2층의 방 한쪽 구석,
낡은 철제 서랍장을 열었을 때, 그 안에서 손글씨로 쓰인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2. 한 권의 노트 – 고아원 아이의 손글씨
키워드: 고아원 일기장, 아동 기록, 손글씨 유물
일기장은 A5 사이즈의 줄노트였으며, 표지에는 연필로 쓴 듯한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2001년 4월부터 7월까지의 기록으로 보이는 이 일기장은
한 아이가 이곳에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일상, 꿈과 불안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글씨는 삐뚤빼뚤했지만, 또박또박 적으려는 의지가 느껴지는 문장들이 인상 깊었다.
“오늘은 ○○누나가 나한테 귤을 줬다. 좋았다.”
“나는 빨리 커서 아빠처럼 되고 싶다. 내 아빠가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강했을 것 같다.”
“밤에 울다가 ○○선생님한테 혼났다. 내일은 안 울 거다.”
그 문장들은 단순한 아동의 글이 아니라,
부재 속에서 스스로를 다잡으려는 한 인간의 내면적 독백처럼 느껴졌다.
일기장은 그 자체로, 이 폐허 공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정서적 중심이었다.
3. 생활관의 구조 – 아이들의 흔적이 사라지지 않은 곳
키워드: 고아원 생활관, 아동 시설 구조, 폐건물 내부
일기장을 품에 안고 둘러본 생활관은 1인용 침대가 줄지어 배치된 기숙형 구조였다.
이불은 사라졌지만, 침대 프레임마다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어떤 이름은 지워졌고, 어떤 이름은 아직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책상 위엔 학교 교과서와 낙서된 공책, 그림일기, 알림장 등이 먼지와 함께 흩어져 있었고,
창틀에는 접은 종이비행기와 무지개 색 종이학 몇 마리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면 한쪽엔 아이들이 만든 듯한 자기소개 포스터와 '우리의 약속'이 손글씨로 정리되어 있었다.
이 폐허의 공기는 정적이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물건 하나하나가 아이들의 존재와 감정을 침묵 속에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기장의 내용은, 그런 물건들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4. 식당과 놀이방 – 공동체의 흐릿한 온기
키워드: 고아원 식당, 아동 놀이 공간, 공동체 생활 흔적
생활관을 나와 식당 쪽으로 향했다.
식당 입구에는 ‘오늘의 식단표’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고,
그 옆에는 음식에 대한 감사기도문이 액자로 걸려 있었다.
식탁은 가로로 길게 배치되어 있었고,
서랍장에는 아직도 스테인리스 숟가락과 작은 플라스틱 컵들이 남아 있었다.
놀이방은 벽지에 알록달록한 동물 스티커와 낙서가 가득했고,
한쪽 구석엔 텔레비전과 비디오 플레이어,
그리고 낡은 퍼즐 조각과 반쯤 망가진 블록 장난감이 흩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공간은 여전히 따뜻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비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집단 생활의 기운과 아이들의 생기 있는 에너지가 채워져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폐허가 되었지만, 그곳엔 아직도 공동체의 흐릿한 온기가 느껴졌다.
5. 교사 숙소와 기록실 – 사라진 관리자의 그림자
키워드: 고아원 교사 공간, 운영 기록, 사무실 폐허
건물 끝에 위치한 교사 숙소는 비교적 잘 정돈된 구조였다.
침대, 옷장, 책상 외에도 운영일지, 방문자 명단, 아이들 상담 일지가 일부 보관된 채 남아 있었다.
특히 기록실에서 발견한 복지부 감사 서류, 아동 출결현황, 교육 활동 계획표는
이곳이 단순한 거주시설이 아닌 교육과 관리가 함께 이뤄지던 복합 공간임을 보여줬다.
교사들의 메모에는 “○○가 오늘도 밥을 남겼다. 이유를 물어보니 말이 없다.”
“△△는 체육 시간에 웃었다. 오랜만에 본 표정이었다.”
이처럼 아동들의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기록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감시가 아닌 돌봄의 시선을 받고 있었음을 말해주었다.
이 기록들과 일기장이 만나면서,
한 장소에 두 종류의 시선(아이의 내부와 관리자의 외부)이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은 폐허 탐험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양면의 정서 기록이었다.
6. 일기장이 남긴 메시지 – 폐허 속에서도 살아 있는 목소리
키워드: 감정 기록, 고아원 폐허 의미, 도시 탐험 윤리
우리는 종종 폐허에서 구조물과 잔해만을 본다.
그러나 이 고아원에서는 한 권의 일기장이
공간의 감정을 증폭시키고, 우리가 관찰하는 시선에 책임을 부여했다.
이 일기장은 단지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했던 한 아이의 목소리와 일상의 축적이었다.
그 글을 읽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탐험자가 아니라
기억의 중개자이자 감정의 수신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장소를
소비하거나 전시하는 대상이 아닌, 조용히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 공간으로 보아야 한다.
고아원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수많은 삶의 조각들이
일기장의 문장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
그것이 이번 탐험이 남긴 가장 큰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