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 정책 기억의 의미와 조직 학습의 필수 조건
정책은 단순히 현재를 운영하는 행정 수단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하나의 제도가 만들어지기까지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 수정과 보완이 반복된다. 특히 실험 정책은 이러한 과정이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작은 규모에서 시도된 정책 실험은 현장의 반응을 관찰하고 문제점을 발견하며, 제도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준다. 이때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는 다음 정책 설계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행정 조직은 점진적으로 학습하고 발전한다. 다시 말해 정책의 진화는 ‘조직 기억’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만약 이 기억이 축적되지 않고 사라진다면 행정은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미 경험한 시행착오를 또다시 반복하게 되고, 정책 효율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실험 정책의 기억을 보존하는 일은 단순한 기록 관리가 아니라 행정 발전의 핵심 조건이다. 문제는 현실에서 이러한 기억이 체계적으로 유지되지 못하고 쉽게 단절된다는 점이다. 이 단절 구조가 바로 정책 발전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다.

2. 한시 조직 운영과 인력 순환보직의 기억 소멸 구조
실험 정책의 기억이 단절되는 가장 큰 이유는 행정 조직의 운영 방식에 있다. 많은 실험 사업은 특정 기간 동안만 운영되는 한시 조직이나 태스크포스에서 담당한다. 사업이 종료되면 해당 팀은 해체되고 인력은 각 부서로 흩어진다. 이 과정에서 실험을 통해 축적된 경험은 조직 차원이 아니라 개인 차원에 머무르게 된다. 담당자가 다른 부서로 이동하거나 퇴직하면 기억도 함께 사라진다. 또한 공공기관의 순환보직 제도는 일정 기간마다 담당자를 교체함으로써 전문성과 지속성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담당자는 이전 사업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업무를 인수받는다. 문서는 남아 있지만 실제 경험은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조직 차원의 기억 체계가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결국 실험 정책은 매번 ‘새로운 시도’처럼 취급되며 과거의 학습이 이어지지 않는다. 한시 조직과 잦은 인사 이동은 정책 기억을 구조적으로 소멸시키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3. 형식적 기록 체계와 활용되지 않는 문서 중심 행정
기억 단절은 기록 방식에서도 발생한다. 대부분의 실험 정책은 종료 후 결과보고서와 평가 문서를 작성한다. 겉보기에는 충분한 기록이 남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문서는 주로 행정 절차와 감사 대응을 위한 형식적 자료에 가깝다. 핵심 교훈이나 현장 경험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기보다 통계 수치와 행정 서식 중심으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더 큰 문제는 작성된 문서가 실제 정책 설계 과정에서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부 서버나 문서 관리 시스템에 저장된 채 누구도 다시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록이 ‘보관’을 목적으로만 존재하고 ‘활용’을 전제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서가 살아 있는 지식으로 기능하지 못하면 조직 기억도 형성될 수 없다. 결국 기록은 남지만 기억은 사라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형식적 문서 중심 행정은 실험의 경험을 지식 자산이 아닌 단순 행정 결과물로 전락시킨다.
4. 부서 분절과 정보 공유 부족이 만드는 정책 단절
행정 조직의 구조적 분절 또한 정책 기억 단절을 심화시킨다. 실험을 수행한 부서와 실제 제도 설계를 담당하는 부서가 서로 다른 경우가 많고, 부서 간 협업과 정보 공유는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로 인해 실험 결과가 조직 전체에 전달되지 않는다. 특정 부서에서 얻은 교훈이 다른 부서에는 전해지지 않은 채 고립된다. 비슷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부서가 유사한 실험을 다시 시작하는 상황도 반복된다. 이는 동일한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흩어지는 구조다. 조직 전체가 하나의 학습 공동체로 작동하지 못하고 각 부서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셈이다. 이러한 분절 구조에서는 정책 기억이 통합적으로 형성될 수 없다. 결국 실험은 지역적 경험에 머물고 제도적 혁신으로 확산되지 않는다. 정보 공유 부족은 행정 조직을 ‘기억하지 못하는 시스템’으로 만들며, 실험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린다.
5. 조직 기억 복원을 위한 학습 행정 전환과 구조 개선 과제
실험 정책의 기억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구조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실험 결과를 단순 문서가 아니라 정책 자산으로 인식해야 한다. 모든 실험 데이터와 교훈을 통합 플랫폼에 축적하고, 다른 부서와 기관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공유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담당자 교체 시 체계적인 지식 이전 절차를 제도화해 경험이 개인에게 머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평가 보고서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되어야 하며, 다음 정책 설계 과정에서 반드시 참고하도록 의무화할 필요도 있다. 이러한 장치가 마련될 때 행정은 비로소 ‘기억하는 조직’이 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매번 새로 시작하는 행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경험 위에서 출발하는 학습 행정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후자를 선택할 때 실험 정책은 더 이상 사라지는 시도가 아니라 축적되는 자산이 되고, 정책 발전은 비로소 현실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