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 정책 기록의 존재와 ‘보이지 않는 정책’의 역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매년 수많은 실험 정책을 추진한다. 시범사업, 파일럿 프로그램, 한시적 지원 모델 등 이름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시험하기 위한 시도가 이어진다. 이러한 사업들은 모두 예산 집행 내역과 운영 결과, 참여 통계, 평가 보고서 형태로 기록된다. 행정 절차상 기록은 필수이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정책은 사라지지 않는다. 문서로 남아 있고, 필요하면 열람도 가능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많은 실험 정책은 사회적 기억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은 해당 정책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언론이나 공론장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기록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다. 이로 인해 실험 정책은 실제 행정 역사 속에서는 수없이 반복되지만 사회적 인식에서는 ‘없었던 일’처럼 취급된다. 이러한 괴리는 단순한 관심 부족이 아니라 행정 시스템과 정책 소통 구조의 근본적인 문제에서 비롯된다.
2. 행정 문서 중심 기록 체계와 접근성 한계 문제
기록은 있지만 논의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행정 문서 중심 기록 체계에 있다. 대부분의 실험 정책 결과는 내부 보고서, 평가 자료, 회의록 형태로 정리된다. 이 문서들은 행정 절차를 완료하기 위한 형식적 성격이 강하며, 일반 시민이 이해하기 쉬운 구조로 작성되지 않는다. 전문 용어와 통계 수치, 내부 기준이 중심이 되다 보니 외부에서 접근하기 어렵다. 공개되더라도 정보공개 청구나 특정 경로를 통해서만 열람 가능한 경우가 많다. 즉, 기록은 존재하지만 사실상 닫혀 있는 정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정책 경험이 공공 자산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시민과 연구자, 다른 기관이 참고할 수 없는 기록은 사회적 논의를 촉발하지 못한다. 결국 문서 보존은 이루어지지만, 정책 지식으로의 전환은 실패한다. 기록이 살아 있는 정보가 아니라 ‘보관 자료’에 머무르면서 실험 정책은 자연스럽게 공론장에서 배제된다.
3. 정책 논의 구조 부재와 공론장 연결 단절
또 다른 문제는 실험 정책을 공론장으로 연결하는 논의 구조 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정책이 사회적으로 논의되기 위해서는 언론 보도, 토론회, 연구 분석, 시민 의견 수렴 등 다양한 경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많은 실험 정책은 소규모·한시 사업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과정이 생략된다. 정식 제도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회적 토론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 결과 정책은 행정 내부에서만 존재하고 외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실험 단계에서 얻은 교훈이나 실패 경험이 공유되지 않으면 정책 학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이나 기관은 동일한 문제에 대해 다시 처음부터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이는 행정 자원의 중복과 비효율로 이어진다. 논의 구조의 부재는 단순히 소통 부족을 넘어, 정책 발전 자체를 가로막는 구조적 단절로 작용한다.

4. 단기 성과 중심 문화와 기억되지 않는 정책의 소비성
단기 성과 중심 행정 문화도 실험 정책이 논의되지 않는 원인 중 하나다. 행정 조직은 빠른 성과를 보여주는 사업에 집중하며, 종료된 사업에 대한 장기적 평가나 재조명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실험이 끝나면 다음 사업으로 이동하고, 이전 사업은 자연스럽게 잊힌다. 정책이 축적되는 대신 소비되는 구조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는 실험 정책이 ‘일회성 이벤트’처럼 취급된다. 잠시 주목을 받다가 종료와 동시에 관심에서 사라진다. 시간이 지나면 정책의 존재 자체가 기억되지 않는다. 기록은 파일로 남아 있지만 실제 정책 역사에서는 공백처럼 느껴진다. 축적과 학습이 아니라 반복과 소멸이 일어나는 구조 속에서 실험 정책은 사회적 자산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는 행정 시스템이 경험을 저장하고 활용하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5. 사회적 신뢰와 정책 학습 기회의 상실
기록만 남고 논의되지 않는 실험 정책은 사회적 신뢰 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시민은 정부가 어떤 시도를 했고 어떤 성과와 한계를 경험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책 과정을 신뢰하기 어렵다. 정책은 투명하게 공유될 때 공공성을 인정받는다. 그러나 정보가 내부에만 머무르면 행정은 폐쇄적으로 보이고, 정책 결정 과정 역시 불투명하게 느껴진다. 또한 실험에서 얻은 성공 사례와 실패 교훈이 공유되지 않으면 사회 전체의 정책 학습 기회도 사라진다. 같은 실수가 반복되고, 유사한 실험이 다시 추진된다. 이는 시간과 예산의 낭비로 이어진다. 결국 논의되지 않는 기록은 행정 내부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 손실을 초래한다. 정책 경험이 지식으로 전환되지 못하면 실험의 의미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다.
6. 기록을 ‘논의’로 전환하기 위한 구조 개선 과제
실험 정책의 기록이 실제 논의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행정 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평가 결과와 운영 경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공개하고, 시민과 전문가가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요약 보고서, 데이터 공개, 사례 중심 분석, 공개 토론 등을 통해 기록을 살아 있는 정보로 전환해야 한다. 또한 실험 종료 이후 반드시 정책 성과를 재검토하는 공식 절차를 마련해 공론장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실험은 단순한 내부 프로젝트가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배우는 과정이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록의 존재가 아니라 기록의 활용이다. 우리가 실험 정책을 문서로만 남길 것인가, 아니면 사회적 논의를 통해 제도로 발전시킬 것인가에 따라 정책의 미래는 달라진다. 이러한 전환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실험 정책은 ‘사라진 사업’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