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기록 중심 사회 실험 구조와 행정 절차 우선 문화
사회 실험은 본래 새로운 정책을 검증하고 개선하기 위한 학습 과정이다. 작은 규모에서 시도하고, 현장에서 나타나는 효과를 관찰하며, 이를 바탕으로 더 나은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핵심 목적이다. 그러나 실제 행정 현장에서 운영되는 많은 사회 실험은 ‘학습’보다는 ‘기록’에 더 큰 비중을 둔다. 사업 기획 단계부터 결과 보고서 작성, 예산 정산, 평가 문서 제출 등 절차 중심 업무가 강조된다. 실험이 끝났을 때 무엇을 배웠는지보다, 어떤 문서를 남겼는지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정책 실험이 살아 있는 변화 과정이 아니라 행정 업무의 하나로 전환된다. 담당자는 현장 개선보다 보고서 형식을 맞추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고, 실험의 본질은 점차 흐려진다. 기록 자체는 필요하지만, 기록이 목적이 되는 순간 실험은 형식적 절차로 축소된다. 행정 절차 우선 문화는 사회 실험을 ‘변화를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서류를 완성하는 사업’으로 바꾸는 출발점이 된다.
2. 문서화 중심 평가 체계와 실질 성과 왜곡 문제
기록 중심 사회 실험의 두 번째 한계는 문서화 중심 평가 체계다. 대부분의 실험은 종료 시점에 방대한 평가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그 내용은 실제 변화보다 수치와 형식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참여 인원 수, 예산 집행률, 일정 준수 여부 같은 정량 지표는 문서화하기 쉽지만, 정책이 현장에서 만들어낸 질적 변화는 표현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측정 가능한 항목만 강조되고, 중요한 성과는 평가에서 제외된다. 정책의 본래 목적이 삶의 질 개선이나 구조적 문제 해결임에도, 보고서에는 단순 수치만 남는다. 이러한 왜곡은 정책 판단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치가 좋으면 성공, 수치가 낮으면 실패로 단순 분류되며 복합적인 맥락은 사라진다. 결국 기록은 남지만 실제 의미는 전달되지 않는다. 문서화 중심 평가는 실험의 깊이를 얕게 만들고, 제도 개선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한다.
3. 기록 축적과 활용 단절의 정보 사장 구조
또 다른 구조적 한계는 기록이 축적되지만 활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 실험 보고서는 대부분 내부 시스템에 저장되거나 특정 부서 서버에 보관된다. 접근성이 낮고, 다른 부서나 기관이 쉽게 참고하기 어렵다. 담당자가 바뀌면 이전 기록은 사실상 잊힌다. 이는 기록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정책 자산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다. 정보가 살아 움직이기 위해서는 공유와 재사용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기록 중심 구조에서는 보관 자체가 목표가 된다. 결국 문서는 쌓이지만 정책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비슷한 실험이 반복되고, 과거의 실패가 다시 발생한다. 이는 행정 시스템이 ‘기억하는 조직’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기록이 단순 보존 자료로 남는 한, 실험은 축적되지 못하고 매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비효율이 계속된다. 정보 사장 구조는 사회 실험의 성과를 서류 더미 속에 묻히게 만드는 핵심 원인이다.
4. 기록 중심 한계를 넘어 학습 중심 행정으로의 전환 과제
기록 중심 사회 실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기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하며, 실험의 핵심은 학습과 개선에 있어야 한다. 평가 보고서는 형식적 문서가 아니라 실제 정책 설계에 활용되는 지식 자료로 재구성되어야 한다. 핵심 성과와 교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다른 부서와 기관이 공유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해야 한다. 또한 실험 종료 이후 반드시 결과를 검토하고 제도 개선으로 연결하는 공식 절차가 마련되어야 한다. 기록이 활용될 때 비로소 정책 자산이 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실험을 하는가, 아니면 더 나은 제도를 만들기 위해 기록을 활용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뀌지 않는 한, 기록 중심 사회 실험은 앞으로도 형식은 남기되 실질적 변화는 만들지 못하는 한계를 반복할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