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 정책 아카이빙의 의미와 정책 기억의 사회적 가치
사회 실험은 단순한 행정 시도가 아니라 한 사회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축적하는 집단적 경험의 과정이다. 새로운 복지 모델, 교육 방식, 노동 제도, 공공 서비스 체계 등을 제한된 범위에서 시험하며 얻은 결과는 그 자체로 하나의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다음 정책 설계의 토대가 되고,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안전장치가 된다. 이때 핵심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아카이빙이다. 아카이빙은 단순히 문서를 보관하는 행위가 아니라 실험의 맥락과 교훈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사회적 기억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사회가 경험한 시행착오를 공통 자산으로 축적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기록이 제대로 남지 않는다면 정책은 매번 새롭게 시작하는 일회성 시도로 전락한다. 기억이 없는 사회는 학습할 수 없고, 학습하지 못하는 사회는 발전하기 어렵다. 결국 실험 정책의 아카이빙은 행정 효율성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지속 가능성과 직결된 문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수많은 실험이 진행되면서도 체계적 기록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위험이 발생한다.
2. 기억 단절 구조와 동일한 실패 반복의 정책 퇴행 위험
실험 정책을 아카이빙하지 않는 사회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위험은 ‘반복되는 실패’다. 과거에 이미 효과가 없다고 확인된 정책 방식이 이름만 바뀐 채 다시 등장하고, 동일한 문제점이 여러 차례 되풀이된다. 이는 정책 담당자가 이전 경험을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록이 없다면 과거의 실패는 교훈이 되지 못하고 단순한 사건으로 사라진다. 결국 행정은 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게 된다. 예산과 인력, 시간이 불필요하게 소모되고 시민 신뢰도는 점점 낮아진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정책은 발전이 아니라 퇴행을 경험한다. 새로운 시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재현하는 데 불과한 것이다. 아카이빙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실험은 축적되지 않고 흩어진다. 이는 마치 매년 같은 교과서를 잃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과 같다. 학습이 누적되지 않는 구조에서는 아무리 많은 실험이 이루어져도 정책 수준은 크게 향상되지 않는다. 결국 사회 전체가 비효율의 늪에 빠지게 된다.

3. 데이터 소멸과 정책 자산 낭비가 만드는 행정 비효율 문제
아카이빙 부재는 단순히 기억 상실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자산 낭비로 이어진다. 하나의 시범사업에는 적지 않은 예산과 인력이 투입된다. 현장 조사, 참여자 관리, 효과 분석 등 다양한 과정에서 귀중한 데이터가 생산된다. 이는 연구 기관이 수행하는 대규모 실험 못지않은 가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 종료 후 자료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거나 내부 서버 어딘가에 방치된다면, 그 데이터는 사실상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활용되지 않는 정보는 존재 의미를 잃는다. 이는 공공 자원의 낭비다. 같은 주제를 다시 조사하고 같은 데이터를 다시 수집하는 일이 반복되면서 행정 비용은 계속 증가한다. 만약 과거 자료가 체계적으로 아카이빙되어 있었다면 훨씬 적은 비용으로 더 나은 정책 설계가 가능했을 것이다. 데이터는 쌓였지만 지식으로 전환되지 못하는 구조, 이것이 바로 아카이빙 부재가 초래하는 대표적인 행정 비효율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국가 경쟁력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4. 공론화 부재와 사회적 신뢰 하락의 민주주의 위험
실험 정책을 기록하지 않는 문제는 행정 내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민 사회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정책 실험의 과정과 결과가 투명하게 기록되고 공개될 때 시민은 정부의 노력을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이 부실하면 정책은 불투명하게 느껴진다. 무엇을 시도했는지, 왜 실패했는지,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정부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 시민은 정책을 즉흥적 결정이나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인식하게 되고, 참여 의지도 줄어든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책 신뢰는 매우 중요한 자산이다. 아카이빙은 단순한 문서 관리가 아니라 사회적 소통의 기반이기도 하다. 기록이 공개될 때 정책은 사회적 토론의 대상이 되고, 더 나은 대안이 제시된다. 반대로 기록이 사라지면 공론화도 사라진다. 이는 정책 결정 과정의 폐쇄성을 심화시키고 민주적 통제를 약화시킨다. 결국 아카이빙 부재는 사회적 신뢰를 훼손하는 위험 요소로 작용한다.
5. 정책 아카이빙 체계 구축과 학습 사회로의 전환 필요성
이러한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실험 정책을 체계적으로 아카이빙하는 구조를 마련해야 한다. 모든 시범사업의 결과와 데이터를 통합적으로 저장하고,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플랫폼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단순한 보고서 보관이 아니라 핵심 교훈과 분석 결과를 정리한 지식 데이터베이스 형태가 되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정책을 설계할 때 과거 아카이브를 반드시 검토하도록 제도화하면 실험의 성과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다. 실패 사례 역시 중요한 학습 자료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체계가 자리 잡을 때 사회는 ‘기억하는 행정’, ‘학습하는 정책 문화’를 갖게 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매번 같은 실험을 반복하는 사회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경험을 축적하며 발전하는 사회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실험 정책의 아카이빙은 그 갈림길에서 선택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기록을 남기는 사회만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