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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실험을 반복 소비하는 행정 시스템 분석

kimsin22025 2026. 2. 12. 19:20

사회 실험을 반복 소비하는 행정 시스템 분석

 

 

1. 사회 실험 반복 소비 구조와 ‘소모성 정책’의 일상화 현상



사회 실험은 원래 정책 발전을 위한 학습 장치다. 새로운 복지 모델이나 교육 방식, 노동 제도를 제한된 범위에서 시험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더 나은 제도로 발전시키는 것이 본래 목적이다. 즉 실험은 축적을 전제로 한 과정이며, 이전 경험 위에서 다음 단계가 설계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행정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흐름이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각 부처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매년 수많은 시범사업과 파일럿 프로그램이 등장하지만, 그중 실제 제도로 정착하는 사례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업은 일정 기간 운영된 뒤 조용히 종료되고, 다음 해에는 이름만 바뀐 또 다른 실험이 새로 시작된다. 이러한 모습은 실험이 축적되는 구조가 아니라 ‘소비되는 구조’임을 보여준다. 실험이 정책 발전의 디딤돌이 아니라 단기 프로젝트처럼 다뤄지는 것이다. 행정은 실험을 통해 배우기보다 실험 자체를 반복 수행하는 데 익숙해진다. 결과적으로 정책은 항상 시험 단계에 머물고, 근본적 변화는 지연된다. 이는 사회 실험이 제도 혁신의 수단이 아니라 일회성 행정 이벤트로 전락했음을 의미한다. 실험이 반복될수록 오히려 발전이 더뎌지는 역설이 여기서 발생한다.



2. 단년도 예산과 사업 공모 중심 구조가 만드는 실험 남발 체계



행정 시스템이 실험을 반복 소비하는 첫 번째 원인은 재정 및 사업 설계 방식에 있다. 많은 시범사업은 단년도 예산이나 공모사업 형태로 운영된다. 중앙정부나 상위 기관이 일정 기간 동안 예산을 배정하고, 하위 기관은 해당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사업 계획을 제출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 아니라 ‘선정 가능성’이다. 기존 사업을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보다 새롭고 눈에 띄는 기획을 제시하는 것이 유리하다. 결국 행정은 계속해서 새로운 실험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기존 사업을 장기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은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한다. 또한 단년도 예산 구조에서는 장기 계획 수립이 어렵다. 다음 해 지원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인력과 시스템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기 힘들다. 자연스럽게 사업은 짧게 운영되고, 종료 후 사라진다. 이렇게 되면 실험은 ‘잠깐 실행 후 폐기’되는 패턴을 반복하게 된다. 재정 구조 자체가 실험을 축적이 아닌 소비 대상으로 만드는 셈이다. 정책이 제도로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행정 설계 단계에서 이미 결정되고 있는 것이다.

 


3. 조직 분절과 기록 활용 부재가 만드는 학습 없는 행정 구조



행정 조직의 구조적 분절 또한 실험 소비를 가속화한다. 실험 정책은 특정 부서나 태스크포스에서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이 종료되면 담당 조직은 해체되고 인력은 다른 업무로 이동한다. 이때 축적된 경험과 데이터는 조직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보존되지 않는다. 담당자의 개인 기억에만 남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설령 보고서가 작성되더라도 이는 행정 절차용 문서로 보관될 뿐, 실제 정책 설계에 적극 활용되지는 않는다. 다른 부서가 유사한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과거 자료를 참고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다시 실험을 시작한다.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범사업이 반복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는 명백한 학습 실패다.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험은 자산이 아니라 소모품이 된다. 행정은 매번 새롭게 시도하지만 실제로는 같은 자리에서 맴돈다. 조직이 기억하지 못하는 한 발전은 불가능하다. 결국 실험은 축적되지 않고 흩어지며, 정책은 구조적으로 반복 소비되는 운명에 놓인다.

 


4. 성과주의 문화와 보여주기식 행정이 만드는 구조적 악순환



마지막으로 문화적 요인 역시 중요하다. 많은 행정 조직은 장기적 성과보다 단기적 가시성을 중시한다. 새로운 시범사업을 시작하면 보도자료와 홍보가 가능하고, ‘혁신적인 정책 추진’이라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반면 기존 사업을 조용히 개선하고 안정화하는 과정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이로 인해 실험은 정책 혁신의 수단이 아니라 보여주기식 성과 도구로 활용된다. 담당자 입장에서도 새로운 사업을 기획하는 것이 평가에 유리하고, 실패 위험이 있는 제도 전면 개편은 부담스럽다. 결국 실험은 계속 시작되지만 제대로 끝나지 않는다. 성공 여부와 무관하게 다음 사업으로 넘어가는 패턴이 고착된다. 이는 실험 남발 → 축적 실패 → 다시 새로운 실험이라는 악순환을 만든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실험을 통해 배우기 위해 정책을 운영하는가, 아니면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정책을 운영하는가라는 질문이다. 후자에 머무는 한 행정 시스템은 계속해서 실험을 소비할 뿐, 진정한 제도 혁신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사회 실험이 자산이 되기 위해서는 축적과 학습을 중심에 둔 행정 구조로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