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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 정책이 ‘한 번 하고 끝나는’ 이유

kimsin22025 2026. 2. 12. 11:17

1. 실험 정책의 본래 목적과 제도화로 이어져야 할 이상 구조



실험 정책은 본래 제도를 완성하기 위한 준비 단계다. 새로운 복지 모델이나 교육 제도, 노동 정책을 곧바로 전국적으로 시행하기에는 위험이 크기 때문에 제한된 범위에서 먼저 시험하고 효과를 검증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성공 요인을 발견하고 실패를 수정한 뒤 정식 제도로 확대하는 것이 정책 설계의 이상적인 흐름이다. 다시 말해 실험은 ‘시작’일 뿐 ‘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실험의 목적은 경험을 축적해 더 나은 제도를 만드는 데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 이상적인 구조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많은 실험 정책이 일정 기간 운영된 뒤 조용히 종료되고, 이후 제도화 단계로 이어지지 않는다. 정책 현장에는 수많은 시범사업이 존재했음에도 실제로 상시 제도로 정착한 사례는 많지 않다. 결국 실험은 도입과 종료만 반복되는 일회성 이벤트처럼 소비된다. 이 지점에서 근본적인 질문이 생긴다. 왜 실험은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이 되어버렸을까. 그 이유는 개별 사업의 성패가 아니라 행정 구조 자체에 내재된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

 


2. 한시적 시범사업 설계와 단년도 예산 구조의 지속성 부족



실험 정책이 한 번 하고 끝나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한시적 설계 방식이다. 대부분의 실험 사업은 ‘1년 또는 2년 한정’ 같은 기간 제한을 전제로 시작된다. 예산 역시 단년도 편성이나 특별 지원금 형태로 마련된다. 이는 처음부터 장기 운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구조다. 사업이 성과를 내더라도 다음 해 예산이 확보되지 않으면 자동 종료된다. 행정적으로는 성공과 실패와 무관하게 ‘기간 만료’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담당자도 장기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인력 채용이나 시스템 구축 같은 지속적 투자를 주저하게 되고, 단기 성과 중심 운영이 일상화된다. 결국 실험은 ‘잠깐 해보는 사업’으로 인식된다. 아무리 좋은 결과가 나와도 안정적 재원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도화는 불가능하다. 정책의 지속성은 재정 구조에서 시작되는데, 현재의 한시 예산 체계는 실험을 태생적으로 소모성 사업으로 만드는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3. 조직 해체와 인사 순환이 만드는 정책 기억 단절 문제



두 번째 이유는 조직 구조에서 발생한다. 실험 정책은 대개 별도 태스크포스나 임시 전담팀이 운영한다. 사업 종료와 동시에 이 조직은 해체되고, 담당자들은 다른 부서로 이동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크게 손실되는 것은 ‘경험’이다. 실험을 통해 축적된 노하우와 현장 지식이 조직 차원에서 보존되지 못하고 개인의 기억에만 남는다. 담당자가 바뀌면 사실상 모든 것이 초기화된다. 새로 배치된 직원은 과거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업무를 다시 시작한다. 결국 이전 실험과의 연결 고리가 사라진다. 이는 조직 차원의 학습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정책은 축적되어야 발전하는데, 기억이 단절되면 매번 처음부터 다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실험이 반복될 뿐 발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직 해체와 순환보직 중심 행정은 실험을 일회성 사건으로 만들고, 제도화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약화시킨다.

 

 

 

실험 정책이 ‘한 번 하고 끝나는’ 이유

 

 


4. 형식적 평가 보고서와 데이터 활용 부재의 학습 실패



실험 정책이 끝으로만 남는 또 다른 이유는 평가 체계의 한계다. 대부분의 시범사업은 종료 후 결과보고서를 작성한다. 겉보기에는 충분한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내용은 행정 절차를 충족하기 위한 형식적 지표가 대부분이다. 예산 집행률, 참여 인원, 일정 준수 여부 같은 수치는 정리되지만, 왜 성공했는지 혹은 왜 실패했는지에 대한 심층 분석은 부족하다. 더욱이 이러한 자료가 다음 정책 설계 단계에서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보고서는 제출과 동시에 보관 문서가 된다. 데이터가 의사결정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실험은 학습 과정이 될 수 없다. 결국 행정은 ‘해봤다’는 기록만 남길 뿐 실제로 배우지 못한다. 학습이 없는 실험은 단순한 이벤트에 불과하다. 형식적 평가 체계는 실험을 제도 개선의 근거가 아니라 행정 절차의 일부로 축소시키며, 그 결과 대부분의 정책이 자연스럽게 종료 단계에서 멈춘다.



5. 위험 회피 문화와 책임 부담이 만드는 제도화 기피 현상



문화적 요인도 중요한 원인이다.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제도를 전면 개편하는 결정은 큰 책임을 수반한다. 법령 개정, 예산 확대, 이해관계 조정 등 복잡한 절차와 정치적 부담이 뒤따른다. 만약 실패하면 책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러한 위험을 감수하기보다 기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전한 선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실험은 허용되지만, 제도화는 미뤄진다. 담당자 입장에서는 ‘시범사업으로 끝내는 것’이 가장 부담이 적다. 결과가 좋으면 참고 사례로 남기고, 나쁘면 조용히 종료하면 된다. 이 같은 위험 회피 문화는 혁신을 가로막는다. 실험은 계속되지만 실제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정책은 변화 없는 반복 속에 머문다. 책임을 두려워하는 행정 문화가 실험을 소극적 도구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6. 제도 중심 행정 전환과 실험 축적 구조 구축의 필요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험을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제도 설계의 필수 단계’로 재정의해야 한다. 실험 단계에서부터 성공 시 확대·정착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제도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장기 예산 확보, 조직 기억 보존, 평가 결과 공유,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체계가 함께 구축되어야 한다. 또한 실패를 공개하고 학습 자산으로 활용하는 문화도 필요하다. 실험이 끝이 아니라 다음 단계의 출발점이 되도록 설계할 때 비로소 정책은 발전한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계속 시험만 하는 행정을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실험을 축적해 제도를 완성하는 행정으로 전환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후자를 선택하지 않는 한 실험 정책은 앞으로도 ‘한 번 하고 끝나는 사업’으로 남을 것이다. 결국 지속 가능한 정책 혁신은 실험을 남기는 구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