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실험 정책 기록의 존재와 정책 기억의 사회적 의미
사회 실험은 단순한 행정 시도가 아니라 정책 발전을 위한 학습 과정이다. 새로운 복지 서비스, 교육 방식, 노동 제도, 지역 경제 모델 등을 제한된 범위에서 시험하면서 축적되는 경험과 데이터는 향후 정책 설계에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실험 정책은 종료 후 결과보고서와 평가 자료를 남긴다. 겉보기에는 기록이 충분히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수많은 문서와 통계, 회의록, 내부 평가서가 행정 시스템 안에 축적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 기록이 실제로 ‘기억’으로 기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록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만 정책 결정 과정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마치 도서관에 책이 가득하지만 아무도 읽지 않는 상황과 같다. 정책은 과거 경험 위에서 발전해야 하는데, 기록이 살아 있는 지식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결국 실험은 남았지만 교훈은 사라진다. 이는 기록 관리의 문제가 아니라 행정 구조 전반의 문제다. 기록과 정책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 실험은 역사 속 참고 자료로만 남고, 현실 정책과는 무관한 존재가 된다. 이렇게 실험 정책은 ‘기록 속 존재’로 머물다가 점차 잊히게 된다.

2. 형식적 보고 체계와 읽히지 않는 문서 중심 행정 구조
기록 속 실험 정책이 잊히는 첫 번째 이유는 형식적 보고 체계 때문이다. 시범사업이 종료되면 담당 부서는 반드시 결과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보고서는 주로 행정 절차를 충족하기 위한 문서에 가깝다. 예산 집행 내역, 일정 관리, 참여 인원 수, 사업 진행 단계 같은 형식적 정보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정책이 왜 효과가 있었는지, 어떤 조건에서 실패했는지에 대한 심층 분석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또한 문서 형식이 지나치게 관료적이고 복잡해 실제로 읽고 활용하기 어렵다. 표와 수치 중심의 자료는 현장의 맥락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결국 보고서는 ‘제출용 문서’가 되고, 정책 설계에 참고할 ‘지식 자료’로 기능하지 못한다. 시간이 지나면 누구도 다시 열어보지 않는 파일로 남는다. 기록은 존재하지만 활용되지 않는 상태, 이것이 바로 잊힘의 시작이다. 형식 중심 문서 행정은 실험의 생생한 경험을 죽은 텍스트로 만들어 버리고, 정책 학습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한다.
3. 조직 분절과 담당자 교체가 만드는 정책 기억 단절 문제
두 번째 이유는 행정 조직 구조에 있다. 실험 정책은 특정 부서나 태스크포스에서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사업이 끝나면 조직은 해체되고 담당자는 다른 부서로 이동한다. 이때 기록은 남아 있지만 그 기록의 의미를 이해할 사람은 사라진다. 문서만으로는 현장의 맥락과 판단 과정을 완전히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정책 경험은 사람과 함께 움직인다. 담당자가 바뀌면 사업의 맥락도 함께 끊어진다. 새로 온 담당자는 과거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하지만, 바쁜 행정 환경에서 이를 꼼꼼히 검토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이전 실험은 참고 대상에서 제외되고, 새로운 사업이 다시 기획된다. 이는 조직 차원의 기억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기록은 남았지만 기억은 사라진 상태다. 이러한 단절이 반복되면서 실험 정책은 점점 더 과거의 일이 되고, 현재 정책과의 연결성은 약해진다. 결국 기록은 ‘보관된 자료’로만 존재하고, 실제 의사결정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4. 성과 중심 문화와 실패 은폐가 만드는 역사 왜곡 현상
세 번째 이유는 행정 문화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공공기관은 성공 사례를 중심으로 성과를 평가받는다. 자연스럽게 긍정적 결과만 강조되고, 기대에 못 미친 실험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실패 사례는 책임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에 보고서에서 축소되거나 모호하게 표현된다. 시간이 지나면 성공한 정책만이 공식 연혁에 남고, 중단되거나 실패한 실험은 역사에서 밀려난다. 그러나 정책 발전에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실패 경험일 수 있다. 무엇이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아는 것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실패가 제대로 기록되지 않으면 교훈도 사라진다. 정책 역사는 마치 모든 제도가 순조롭게 발전한 것처럼 왜곡된다. 이러한 왜곡은 미래 담당자에게 잘못된 신호를 준다. 과거의 시행착오를 알 수 없으니 비슷한 실험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결국 실험은 반복되지만 학습은 축적되지 않는다. 성과 중심 문화는 기록을 남기면서도 동시에 기억을 지우는 모순적 구조를 만들어 낸다.
5. 정책 아카이빙 체계 구축과 ‘기억하는 행정’으로의 전환 필요성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록 보관을 넘어 ‘아카이빙’ 관점의 접근이 필요하다. 아카이빙은 문서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 경험을 지식 자산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이다. 실험의 배경, 과정, 실패 원인, 개선점 등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공유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정책을 설계할 때 과거 실험 기록을 반드시 검토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 기록이 실제 의사결정과 연결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기억이 된다. 담당자가 바뀌어도 조직 차원의 학습이 유지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도 중요하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기록을 남기는 행정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기록을 활용하는 행정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후자를 선택할 때 실험 정책은 더 이상 잊히는 과거가 아니라 다음 제도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 결국 정책 발전은 ‘기억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기록이 활용될 때 실험은 비로소 역사로 남는다.